라이프로그


연애의 정석[5-2] love affair

2호선을 타고 신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가 조금 안되었을 때였다. 애초에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만났었지만, 그녀의 수업이 3시에 끝나는 수업이었고, 이후에는 오늘의 약속 때문에 아무 것도 할 게 없었기 때문에 학교가 파한 3시에 만나자고 한 것임을 나는 몰랐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난 앞일은 전혀 생각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어쨌든 그녀와 나는 영화를 보기로 하고, 지하철역에서 나와 아트레온으로 갔다(난 처음 가봤었다). 일반적으로 그리 친하지도 않을 뿐더러, 따로는 처음 만나는 남녀관계였던 우리가 예상치 못한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어색함도 없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특이한 일이었다. 보통 이런 만남에서 여자는 남자가 주도하는 것을 원하는데, 자세한 상황전개가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이야기는 아주 부드럽게 풀렸었다. 당시 그 세밀한 흐름 속에서 무슨 문제점들이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깨닫지 못 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문근영과 박건형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댄서의 순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종류의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지만, 당시 조금 이름이 알려진 영화이기도 했고, 또 아마 시간대가 맞아서 선택했었을 것이다. 당시 반전 영화가 유행했었던 만큼 인터넷 게시판에는 '댄서의 순정 범인은 문근영이다'라는 스포일링이 올라오곤 했었는데, 나는 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대체 문근영이 언제 박건형을 죽일까?"라고 생각했었다. 결국 나에게 이 영화는 반전 영화였던 셈이다.

평범하게 영화를 본 우리의 그 다음 행선지는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우리는 어느 조용한 술집으로 갔다. 현대백화점 뒤에 있는 조그만 공원 옆에 있는 술집이었고, 재수가 끝난 뒤 친구들과 한 번 간 적이 있는 술집이었다. 앞서 언급한 그 술집이 아래로 보이는 높은 빌딩 윗 쪽 층에 있는 가게였는데,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분위기는 나쁘진 않았다(물론 그 점을 빼면 그리 '좋은' 가게는 아니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있을 학회 MT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녀에게 당연히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계속해서 가자고 요구했고, 나는 마지못해 가겠다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둘이서 술을 마시면서 딱히 감정의 깊이가 더해진 것은 크게 없었다. 술을 마시고 가게에서 나와 앞서 언급했던 그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던 우리는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게에서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놀랍도록 즐거운 대화는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녀가 이전보다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약간 빨개진 그녀의 볼을 건드리며 '귀엽네······'라는 말을 했다. 그녀는 그 행동에 대해 크게 반응하진 않았다.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며칠 뒤, 나는 학회MT에 참석했다. 도착해서 딱히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을 떼웠다. 역시 그런 것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리 많은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술자리와 함께 진행된 게임도 재미가 없었다. 술자리 자체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던 것 같지만, 그냥 천천히 마시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흥이 돋지 않으니 역시 지루한 반응을 나타냈고, 그녀는 그런 나를 언제부터 의식했는진 모르겠지만, 미안해했다. 나는 그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지지부진한 술자리가 계속되고 있을 때, 나는 혼자서 강가로 나갔다. 강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혼자 담배를 폈다.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한두 시간 밖에 있던 나에게 그녀가 연락이 왔다. 어디냐고. 나는 강가에 있다고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담요를 두른 그녀가 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고, 그녀는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역시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말했고, 단지 오늘 잠을 자지 않고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학회의 부회장이었던 그녀가 그런 단체 행사에서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나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 반박을 하지 않으면서도 반복해서 자신도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두세 시간 쯤 지나 아침 6시가 되었을 때, 나는 슬슬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굳이 그녀를 깨워서 같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그녀가 나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이 단체에 끼치는 민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가 그녀를 깨웠었는지, 그녀는 여자들이 자고 있던 방에서 잠에 덜 깬 얼굴로 나왔고, 곧 자신의 짐을 챙기고 주변 정리를 했다. 그녀는 큰 밥솥을 들고 왔었는데, 나는 그것을 대신해서 들어주었다. 둘이서 함께 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녀는 춥다고 말했다. 나는 나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표를 구매하고 우리의 자리로 향하던 우리는 한 객차 안에서 우리를 보고 웃는 남자 선배 두 분(엄X빈, 신X환)을 봤지만,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그녀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잠이 와서 그랬을까?). 객차 안에는 자리에 널부러져 잠자고 있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잠이 들었다. 나는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그녀는 나의 하체에 누워서 잤다. 잠자는 그녀의 얼굴을 본 후, 처음으로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귀엽다'라는 표현과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떤 단어가 있다면 그 당시 그녀에 대한 나의 인식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으리라.

청량리역에 도착한 우리는 곧 중앙선(당시에는 1호선 혹은 국철이라고 표현했다)을 탔다. 나는 그녀에게 무거운 밥솥이 있으니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크게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환영하지도 않았다. 단지 잠이 오는 듯 했다. 용산역에서 내린 우리는 곧 주안급행을 타고 신도림으로 향했다. 토요일 아침에 인천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에 사람이 많을리가 만무했다. 우리가 타고 있던 객차에는 오직 우리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묘한 기분을 어떻게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밤을 샜고, 몇 시간 전 처음으로 그녀에게 쉽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 그것도 아주 산뜻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내가 처음 그녀를 그렇게 느꼈던 바로 몇 시간 전과 같이 내 옆에서 나를 의지해 잠을 자고 있었다. 객차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시간은 아침 8시쯤 되었으며, 늦은 봄의 여느 아침과 같이 상쾌한 날씨였다. 창 밖에는 계속해서 오래된 회색빛의 건물들이 보이고 있었으며, 내 귀에는 그녀의 숨소리와 지하철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신도림에 도착하기 전, 아주 조금 정신을 차린 그녀에게 나는 키스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이 와서 그랬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녀가 다시 눈을 감는 것을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나는 부드럽게 키스를 했고, 키스는 얼마 간 이어졌다.

신도림역에 도착한 우리는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냄비를 들고, 한 손에는 그녀를 부축한 나는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키스했다. 횡단보도에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굳이 그 사람들이 신경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오니 꽤 늦은 아침 시간이었다. 나는 그 당시까지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3]의 그녀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그건 아직 모르는 거라고, 좀더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의 말에 수긍한 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아주 깊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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