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연애의 정석[5-1] love affair

앞 장에서 언급하였듯이, 나의 대학생활 전반은 다소간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수업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고, 그저 막 살았다(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그 부분을 제외하면, 내 성격은 언제나 외향적이었다.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상대방들도 나를 그리 어렵게 대하는 경우는 없었다.

입학하기 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나 역시 별 생각 없이 참여했다. 나는 1조였는데, 우리 조에는 남자 선배 한 명과 여자 선배 한 명, 그리고 동기 5명 정도가 있었다. 남자 선배는 국X형이었고, 여자 선배는 김X리였고, 동기들은 이X진, 이X준, 신X기, 전X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한 명 정도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말하자면, 이 장에서 말할 주인공은 여자 선배였던 김X리다. 그렇게 길게 연애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 남아있는 내 20대 초반의 기억 중 아주 많은 부분이 그녀와 연관되어 있다. 아마도 [5]장은 그래서 긴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내 윗 학번이었던 04학번 선배들은 대부분 얌전한 편이었다. 기가 셌던 내 동기들에 비해서 그랬다는 말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후배들에 대한 적극적인 애정은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다(물론 요즘은 대부분은 선배들이 그럴 것이다). 어쨌든 무언가 좀 더 끈끈한 애정이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처음부터 김X리가 여자로 눈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난 연상을 싫어하기 때문에, 비록 동갑이었지만 선배였던 그녀에게 그런 마음을 먼저 먹지는 않았다. 그녀의 성격에 대한 파악도 미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격을 파악할 이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나는 선후배 구분에는 나 스스로 조금 엄격한 편이었다. 그것은 내가 대입 재수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울 수록 지켜야 할 것은 더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가 다른 여자들과 달랐던 점은, 무언가 정이 가는 것을 갖고 있었다. 단지 외모 뿐만이 아니라, 무언가 익숙하고 가까운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 많은 접촉이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OT에서 같은 조에 배정되고, 별 일 없이 여러 가지를 하며 놀았다.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놀았다고 할 수 있다. 넓은 강당에 모여서 단체로 술을 마시며 게임을 했다. 그러다가 03학번 선배인 변X환과 신X우가 합류했고, 그 때부터 아주 재미있게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김X리가 무슨 게임에서 패배했고, 그래서 내가 흑기사로 대신 술을 마셨던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쨌든 무슨 벌칙으로 인해 나는 그녀와 부르스를 추며 '찬찬찬'이라는 트로트 가요를 불렀다. OT는 그렇게 끝났다. 그녀와 별다른 일은 없었다.

며칠 뒤 첫 수강신청의 시기가 왔다. 수강신청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었던 나는 그나마 조금 가까운 선배였던 이X준에게 물어봤고, 그는 수강신청 아침에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수강신청 전날 밤, 그 당시 유행하던 X이월드에 접속해 있던 중 그녀에게서 친구신청과 함께 쪽지가 왔다. 간단한 안부 인사 뒤에 수강신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이X준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고, 그녀는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앞 PC방에서 OT에서 같은 조였던 친구들과 함께 수강신청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수강신청이 시작되기 얼마 전 그녀에게 연락이 왔고, 나는 정문 앞 X도날드 앞에서 그녀를 만났고, 같이 PC방으로 갔다(후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4]의 그녀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이 광경을 보고 나와 그녀의 관계를 짐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와 내 동기들에게 단지 친절한 선배의 태도로 수강신청을 도와줬고, 그녀와 나 사이에는 또 어떤 일도 없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과에는 학회라는 것이 있었다. 학회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과 내의 동아리 같은 것이다. 역사 학술 동아리와 영어 연극 동아리가 있었는데, 두 학회에서는 후배들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신입생들은 저마다 각자의 이유대로 하나의 학회에 가입하거나 했다. 나는 영어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러나 가입이라는 것이 그렇게 큰 형식과 절차를 갖는 것인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이름만 올려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습이 시작되었고, 나는 딱 한 번의 연습에 참여했다. 나에겐 별 의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난 동아리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연습을 앞두고 그녀에게 단체문자가 왔다. 잠수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되어 그녀에게 '앞으로 동아리 활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물론 존댓말로(난 그리 친하지도 않은 선배에게 반말을 쓰고 싶진 않았다). 또 미안하니 밥 한 번 사겠다는 내용도 함께 보냈다. 그저 형식적인 내용이었고, 또 그녀에게서 온 답장도 형식적인 대답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구체적으로, 밥을 사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을 잡았다.

며칠 뒤, 그 영어 연극 학회에서 동아리 MT를 간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당연히 안 가겠다고 답했다. 그러다가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어느 날 평일 오후 3~4시 쯤이었을 것이다. 학교가 파한 뒤 나는 애지문 뒤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났고, 우리는 신촌으로 가서 '밥'을 먹기로 하였다. 그녀는 다소 주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냥 쑥쓰러워서 그런 가 보다,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애지문 계단을 내려가서 신도림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 [4]의 그녀가 친구와 함께 뛰어들어 왔다. 그 순간 김X리의 얼굴을 보니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4]의 그녀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하였고, 곧이어 '두 사람, 어디 가?'라고 물었다. 이 시기 [4]의 그녀가 나에 대한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닌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금 당황하는 김X리를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난 곧 입대하는 04학번 선배였던 장X준의 이름을 대며 김X리와 함께 신촌으로 그를 만나러 간다고 대답했다. 약간의 대화의 끝나고 인사를 나눈 뒤 각자 다른 곳으로 향했다. 둘 만의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김X리는 나의 거짓말에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낼 수가 있냐며. 나는 그녀가 당황하는 것 같아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것을 배려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배려할 수 있는 나에 대해 조금은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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