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ㄱ나니?[4-2] love affair

초여름의 눈부신 토요일 대낮에 집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원망하는 것 같은 뒷모습을 남긴채 그녀는 명동 밀리오레 앞에 있는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가 사라졌고, 사람들의 어지러운 움직임들로 가득찬 곳에서 곧 도착할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밑에서 그녀가 보였고, 그녀는 특유의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왔다. 까맣고 여드름이 많은 피부, 진한 검은색의 반곱슬 머리카락, 마르고 키가 큰 몸매, 약간 휜 다리... 그녀는 내가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우리는 그 사람 많은 곳을 함께 걸으며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맞은 편에 있는 한적한 곳의 계단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때 나는 그녀에게 어린 시절 티비에서만 보던 명동에 지금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마치 명동에 처음 가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는 그녀가 사는 여의도에 있는 한강공원에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공원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글의 제목처럼, 그녀와의 일 중 대부분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 같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고, 그 때부터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얼마 뒤 날이 어두워졌고, 우리는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여의도역으로 향했다. 여의나루역을 지나서 MBC 사옥 방향으로 향하던 중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우리는,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사귀기로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나 나나 그런 것에 크게 예민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나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아주 익숙한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여의도역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우리는 근처에 있는 그녀의 모교로 향했고,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그 날의 만남을 뒤로했다. 다음에 학교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익숙한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다녔고, 한 번씩 캠퍼스 안에서 걸어가다가 키스를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억이지만, 그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일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그녀는 나에게 내가 마치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신경쓰지 않는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촌평했다. 마치 외국에서 꽤 오랜 생활을 한 자기보다도 말이다.

우리의 일상적 데이트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 번은 그녀와 함께 토요일 낮에 홍대에서 만난 적이 있다. 홍대 앞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밖에 모르던 우리는 조금 걷다가 어느 넓은 카페에 들어갔다. 그 카페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고, 의자도 매우 높아서 연인들에게는 꽤 괜찮은 구조였다. 그녀와 나는 알코올이 들어간 칵테일을 주문했고, 칵테일 두 잔 정도를 마신 그녀는 얼굴이 금새 빨개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또 애정행각을 하며 칵테일을 마시던 우리는 그 여름날의 낮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술이 약했던 그녀는 몸을 늘어뜨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카페에서 한참을 있다가 나왔다.

한 번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다가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그녀의 오빠와 아버지를 마주친 적이 있다. 역시 배운 분들이라 그런지 나의 존재를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오빠나 아버지는 둘 다 매우 점잖은 분들 같았다.

어느 날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을 때,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쓰러졌었다고 했다.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웃으며 되물었고, 그녀는 지금 강북 삼성병원에 있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던 나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고, 그녀는 약간의 응급처치를 받은 뒤 병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옆에서는 그녀의 고모가 있었고, 그녀는 조금 어지러워서 쓰러졌었다며 별 일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의 고모와 함께 우리는 택시를 타고 그녀의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할아버지 집은 성북동에 있었다.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집이었다. 거기에 들어가자 그녀의 사촌 여동생과 그녀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인사를 한 후 나와 그녀는 그녀의 사촌동생이 있는 위층에 있는 방으로 가서 좀 쉬었다. 그녀의 어린 사촌동생은 고모의 딸인데, 미국에 살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있다고 했다. 역시 그녀의 사촌동생과 그녀는 영어로 대화를 했다(I'm a patient!).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의 가족과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외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예전엔 대X증권의 사장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 역시 그쪽 계통의 직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을 유럽의 룩셈부르크에서 보냈으며, 거기서 독일어-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또 고등학교 때는 교환학생으로 미국 애리조나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녀가 영어를 '아주' 잘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물론, 그녀의 피부가 그토록 까맣던 이유도).

놀이공원을 좋아했던 나는 그녀에게 잠실에 있는 롯X월드에 가자고 하면서, 그녀에게 놀이공원을 좋아하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고, 며칠 뒤 나와 그녀는 잠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난이도가 좀 높은 놀이기구를 타면서 아주 무서워 했다. 하루종일 놀이기구를 타고 지친 우리는 내 자취방으로 돌아와 조금 잠을 잤다. 아주 더러웠던 그 방에서 그녀는 너무 피곤했는지 잘 잤고, 밤 늦은 시간이 되서 집에 돌아갔다. 그녀와 함께 그 공간에 있으면서, 나는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차마 그녀의 작아 보이는 가슴을 만질 용기는 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꽤 놀랄 것 같기도 했고. 그녀의 등은 그녀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말랐었다.

그렇게 별 특징 없이 백일 정도 만났던 우리는,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만날 때 큰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헤어질 때도 별 이유가 필요하진 않았다. 나는 무언가 정체된 것에 큰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고향에 내려간 나는 그녀에게 통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한 그녀의 반응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그녀는 크게 반응하진 않았다.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녀는 내 사적은 기분을 배려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는(그녀에 대해서는 아닌) 내 기분을 말이다.

다음 장에서 다룰 상대와의 관계가 다시금 발생했다. 발생 직후 나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는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간 그녀에게 계속 연락이 왔었지만, 난 이기적으로 에둘러 대답하거나, 그냥 무시했다. 그녀의 기분을 크게 고려하진 않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비겁함의 발로였던 것 같다.

그렇게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그녀를 아주 빠르게 잊었다. 다른 상대와의 연애를 바로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다른 상대와의 연애라는 게 내 인생에서 꽤 임팩트가 큰 사건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서의 계속된 연락은 점점 줄어들었고, 몇 달 뒤 내 생일의 축하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끊겼다. 그리고 다음 해, 나의 동기이자 그녀와 친한 친구였던 오X진은 나에게 당시 그녀에 대한 말을 해줬다. 그녀가 나와 헤어진 후 아주 힘들어 했다고 말이다. 내 비겁함에 대한 자책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건 당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1학년 2학기 때의 나는 학교에 거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학교에서 마주친 나와 그녀는 간단한 인사를 하며 서로를 지나쳐갔을 뿐이다. 이 인사라는 것도 그녀가 먼저 했다. 나는 끝까지 비겁했다. 그리고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뒤, 군대를 제대한 나는 어느 수업에서 그녀를 만났다. 아마 19세기 영시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와 나는 인사를 나누진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갔고, 그녀는 어느새 졸업을 해버렸다.

그녀와 내가 연애를 한 기간은 100일이 조금 안 되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그녀와 내가 보냈던 일상이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사귀는 동안 큰 갈등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 속에 그녀의 존재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에 대해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 미안함의 감정은 만약 그녀의 기억 속의 내가 내 기억 속의 그녀보다 더 크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면 더욱더 커질 것이다.

그 때의 난 이 미안함의 감정을 피하려고 왜 그리 도망다니기만 했었는지······.

덧글

  • Guramssu 2012/05/04 02:23 # 답글

    +)
    1. 그녀는 항상 약간 짧은 폴로 스타일의 티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그녀의 날씬한 허리 부분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속살 역시 피부색과 마찬가지로 약간 어두운 색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긴 청바지 같은 것을 입었다. 나로서는 이 것이 좀 불만이었다. 하긴, 치마를 입으면 힐을 신어야 하는데, 그녀는 그런 것과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2. 그녀와 내가 함께 걸을 때 그녀는 내 쪽과 가까운 팔로 팔짱을 낀 채 반대 쪽 손으로는 자신이 팔짱을 낀 내 팔의 핏줄을 살짝살짝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 느낌이 좋다고 했었다.

    3. 그녀가 언제 한 번 자신과 친한 동기들 중 한 명을 비판한 적이 있다. 몇 명이 모인 친구 집단의 전형적인 갈등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진X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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