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Academic

몰락의 에티카
- 21세기 문학 사용법

김현(金炫, 문학평론가)


1

문학은 불가피하다.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말과 행동이 형편없는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말이 대개 나의 진정을 실어나르지 못하기 대문이고 행동이 자주 나의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가장 친숙하고 유용해야 할 수단들이 가장 치명적으로 나를 곤경에 빠뜨린다. 왜 우리는 이 모양인가. 개별자의 내면에 '세계의 밤'(헤겔)이, 혹은 '죽음충동'(프로이트)이 있기 때문이다. 부분 안에 그 부분보다 더 큰 전체가 있다는 역설, 살고자 하는 것 안에 죽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는 역설 때문이다. (내가 부정해야만 하는 혹은 나를 부정하려 드는 '그것'을 독일관념론과 정신분석하에 기대어 자기-관계적 부정성self relating negativity이라 부를 수 있다.) 덕분에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과연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캉). 그러니 내 안의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신경증)은 쉬운 일이고 그것에 삼켴지는 것(분열증)은 참혹한 일이다. 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은 그것과 대면하는 일이다. 그 심연에서 나의, 시스템의, 세계의 '진실'을 발굴해내는 일이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바라보겠지만(니체), 그 대치(對峙) 없이는 돌파도 없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일이다.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말에 배반당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을 찾아헤매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한없이 곱씹는다. 그 치열함이 시인의 시적 발화를 독려한다. 한편 행동이 통제 불능이라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 소설가다. 소설가들은 법과 금기의 틀을 위협하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창조하고 그 순간이 요구하는 진실을 오래 되새긴다. 그것이 소설가의 서사 구성을 추동한다. 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 말하자면 나의 진실에 부합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날그날의 효율을 위해 이 질문을 건너뛸 때 우리의 정치, 행정, 사법은 개살구가 되고 만다. 문학이 불가피한 것은 저 질문이 불가피하기때문이다. 문학이라는 제도와 거기서 생산되는 문학 상품들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저 질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모험들이 불가피한 것이다. 시적인 발화의 실험과 소설적인 행동의 감행이 불가피한 것이다.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시하는 그 모든 발화들에서 시적인 것이 발생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시하는 그 모든 행위들에서 소설적인 것이 발생한다.


2

'시적인 것'이란 이런 것이다. 시적 발화는 '빈말'(하이데거)들을 뚫고 나와 격발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발화의 문법들과 냉전하면서 미래를 향해 말의 다리를 놓는다. 예컨대 10여 년 전에 강정이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아름다운 적」, 『처형극장』, 문학과 지성사, 1996)로 시작되는 시를 썼을 때, 그리고 최근에 김경주가 "황혼에 대한 안목(眼目)은 내 눈의 무늬로 이야기하겠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고 이야기하겠다"(「기미畿微」,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로 시작되는 시를 썼을 때, 그들의 발화는 놀랍도록 분방했지만 그것은 어딘가 제 안의 심연을 대면하고 돌아온 오르페우스의 목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뛰어난 시인들은 대개 그렇다. 이미지가 울리기 전에, 이야기가 설득하기 전에, 메시지가 가르치기 전에, 이미 그들의 발성 자체가 독자적인 힘을 갖게되곤 하는 것이다. 이런 시인들은 "시를 삶에 대한 가벼운 복수로 여기는 사람들"(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에게 충고한다. 시란 복수가 아니라 창조라고, 제 안의 심연에서 솟아나오는 한 줄의 발화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기념비'(들뢰즈, 가타리)가 시라고 말이다. 이런 난공불락의 발화도 가능하다, 라고 '시적인 것'은 말한다.

'소설적인 것'이란 이런 것이다. 소설적 행위는 타산적인 행위들을 뚫고 나와 작렬한다. 그것은 쾌락원칙의 기율 안에 엎드려 있는 우리를 가격하면서 '쾌락원칙의 피안'을 넘나드는 실존의 심연을 열어젖힌다. 여기, 이오카스테가 부르짖는다. "오오 불행하신 분이여, 그대가 누구인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오이디푸스 왕』 1068행) 이 절규는 모든 '소설적인 것'들이 작렬하기 직전에 깔리는 무시무시한 전조(前兆)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를 선택하고 끝내 파멸을 향해 간다. 때로 인간은 이렇게 진실이 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하는 제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제 눈을 찔렀다. 그로써 '자기 자신'이기를 선택했다. 이것이야말로 '주체화'의 본래 뜻이다. 이것은 고대의 사례지만 뛰어난 근대소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뛰어난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 눈을 찌르면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이 '낭만적 아이러니'(루카치)로 이어지건 '수직적 초월'(지라르)로 이어지건, 그보다 먼저 세계에 맞서 기꺼이 몰락하기를 선택하는 인물 없이는 '소설적인 것'이 발생할 수 없다. 이런 전대미문의 행위도 가능하다, 라고 '소설적인 것'은 말한다.

시와 소설은 그렇게 어떤 '불가피성'을 겨냥한다. 이를 '애매성'(밀란 쿤데라)이라 해도 좋고 '역설'(서영채)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는 불가피를, 이렇게 행위할 수 밖에 없다는 불가피를 정초한다. 일견 요령부득이지만 기어이 독자를 설복하여 마침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어떤 절대성이 되고 기원이 된다. 이를테면 랭보라는 절대성이 되고 햄릿이라는 기원이 된다. 철학과 정신분석학은 그 불가피성을 해명하려 애쓰는 와중에 자신의 체계를 재정비할 것이다. 그 불가피성은 물론 인간과 시스템의 오작동이지만, 진실은 바로 그 오작동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일러 '문학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다. 비평가는 시집과 소설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질문으로 전환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설사 시집과 소설책이 더이상 제작되지 않고 팔리지 않는 22세기가 온다 해도 비평가는 실업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기어코 어디서든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을 비평할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의 종언'(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6)을 믿지 않는 비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실업의 불안 때문이 아닐 것이다.


3

가라타니가 전하는 바대로라면 한국의 비평가 김종철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문학을 했고,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 그가 '온갖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거대한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끌어안는 어떤 거인을 연상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것은 '총체성'이라는 거인일 것이다. 그러나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하면 어떨까. 이것은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총체성이라는 거인이 연상케 하는 '수평적 포괄'의 뉘앙스 대신 바이러스로서의 문학이 관여하는 '수직적 예리(銳利)'가 또다른 총체성에 가 닿을 수는 없는 것일까를 묻고 있는 것이다. 넓은 총체성이 아니라 깊은 총체성 말이다. 그러나 그 총체성은 이제 망원경이 아니라 내시경에 가까울 것이다. 전망이 아니라 심연을 보여줄 것이다.

가라타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마치 1950년대의 미국에서, 1980년대의 일본에서, 1990년대의 한국에서, 갑자기 모든 문학이 일제히 윤리와 무관해지기로 결심하기라도 한 듯 말한다. 윤리가 정치의 하위 범주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그가 말하는 윤리(도덕)는 대문자 정치에 복속된 윤리에 가깝다. 이 경우 윤리는 국가론과 계급론과 혁명론이라는 거시 전장(戰場)에서 작동할 것이고, (그것이 지배의 정치건 대항의 정치건 여하튼) 특정 정치를 보족하는 윤리가 될 것이다. 그 윤리적 과제를 감당하는 문학은 과연 '지위가 높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시대는 확실히 종언을 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시 층위에서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지푸라기 하나에서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햄릿』, 4막4장) 일을 늘 해왔다. 문학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정치를 보적하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를 창안하는 윤리를 말해야 한다. 거시 전장에서 '대문자 정치'와 제휴하는 윤리는 더이상 문학의 몫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미시 전장에서 '마이너리티의 욕망'과 암약하는 문학은 여전히 윤리적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총체성이 있고 다른 윤리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근대문학이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근대문학의 '전부'라 믿었던 어떤 '부분'이 괴사(壞死)한 것이다. 괴사한 부분을 절제하면서 한 유기체의 종언을 고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유기체는 기형의 형태로 더러 살아남는다. 실로 오늘날의 문학이 그렇다.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내용이 그러하고, 분열증적이고 무정부적인 형식이 또한 그러하다. "초대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김경주, 「시인의 말」, 앞의 책) 그러나 이 기형의 총체성의 파변의 아니라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일 것이다. 혹은 '억압된 총체성'이라 해도 좋다. 문학은 구축하는 초자아의 총체성이 아니라 배제되는 무의식의 총체성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치명적인 진실이 있으니, 이 기형을 대면하고 돌파하는 일은 윤리적이다.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가 문제되는 자리는 '선(善)'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이다. 선의 윤리학과 진실의 윤리학이 있다. 선의 윤리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다. 그것은 치명적인 진실의 바이러스를 선의 이름으로 퇴치한다. 반면 진실의 윤리는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리셋 버튼이다. 그것은 때로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되는 벼락 끝에서의 한걸음이다. 억압된 총체성이 이 진실의 윤리학과 더불어 작동할 때 어쩌면 종언의 종언은 선언될 것이다.


4

그 진실의 윤리학을 위해 문학은 있다. 혹은 문학 안에서 그 진실이 솟아오른다. 물론 시와 소설의 역할이 같지 않다. 시는 발화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틈에서 출몰하는 진실을 겨냥하고, 소설은 행위가 강행되고 철회되는 틈에서 발생하는 진실을 조준한다. 그것이 마침내 격발할 때 진실이 분출하고, 문학의 공간은 '사건'(바디우)의 현장이 된다. 본래 모든 사건은 수많은 단서들이 착종되어 있는 거대한 질문이다. 이 진실을 어찌할 것인가, 이제 다시는 진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이 난감한 질문들 속에서 사건현장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지고 비평은 현장검증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문학은 이제 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라. 문제는 정치(의 윤리)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윤리(의 정치)를 위한 질문이다. 대답하면서 장(場)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면서 장 자체를 개시(開始)한다. 윤리의 영역에서 모든 질문은 첫번째 질문이고, 모든 첫번째 질문은 이미 하나의 창조다. 발화의 종말과 행위의 파국에서 시와 소설은 시작된다. 그대 자신의 말을, 그대 자신의 행위를 하라. 이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라 부를 것이다.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이다. 몰락의 에티카(Ethica)다.


<출처>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2008), 문학동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