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88회. 가슴아팠던 첫사랑의 기억. Artistic

[스포일링] 

'어느 날 내상은 자신의 부인인 유선에게 유선의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본다. 유선은 그런 내상에게 어떻게 22년 동안 같이 산 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모를 수가 있냐며 타박하고, 내상은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유선도 마찬가지라며 응수한다. 이에 둘은 서로의 특징을 문제로 한 퀴즈를 풀고, 내상은 이 퀴즈를 계기로 유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한편, 이 에피소드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석은 여자친구인 하선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서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이에 지석과 하선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이 알고 있던 상대방은 고작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를 계속하던 지석은 자신의 첫사랑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말한 후, 하선에게 하선의 첫사랑에 대해 물어본다. 하지만 하선은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피하며 화제를 전환한다. 

몇일 후, 실내에서 암벽등반을 하던 하선은 우연히 대학시절 암벽등반 동아리 선배를 만나게 되고, 둘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어 그 선배는 하선의 첫사랑의 상대였던 시윤의 이야기를 꺼낸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하선은 캠퍼스를 거닐다 한창 동아리 모집이 이뤄지고 있던 곳을 지나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던 시윤과 부딪히게 된다. 시윤에게 첫눈에 반한 하선은 시윤이 있던 암벽동아리에 가입하게 되고, 남몰래 시윤을 계속 지켜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시윤은 동아리방에서 하선에게 MP3 플레이어 하나를 준다. 곧바로 급한 일이 생겨 그 플레이어를 동아리방에 놔두고 간 하선은 결국 그 플레이어를 잃어버리게 되고, 캠퍼스에서 지나가다 시윤을 만난 하선은 '그거 들어봤어?'라는 시윤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얼마 후 시윤은 군대에 입대하게 되고, 하선은 자신의 사물함에 시윤의 사진을 붙여놓으며 입대한 시윤을 기다린다. 

그토록 기다리던 시윤이 제대했지만, 하선은 시윤에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방 청소를 하던 하선은 쇼파 밑에서 그 플레이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 플레이어에는 하선을 향한 시윤의 마음이,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1987)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시윤의 마음을 확인한 하선은 지리산 암벽등반을 가려고 하고 있는 시윤에게 사실을 말하고, 둘은 시윤이 지리산에 갖다 오는 3일 후 다시 만나기로 한다.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가슴이 벅차지만, 하선은 며칠 후 동아리 사람들에게 시윤이 암벽등반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표현할 길 없는 그 슬픔 앞에서, 하선은 지리산에서 시윤이 보냈었던 편지를 받는다. 시윤은 편지에서 겨울날의 짧은 황혼의 아름다움을 언급하고, 산행이 끝나면 하선을 만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놨었다. 하선은 다시 한 번 오열한다. 

동아리 선배와의 우연한 만남이 끝난 후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있던 지석과 하선, 라디오에서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가 흘러나온다. 하선은 지석에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지만, 이미 하선의 첫사랑이 슬픈 추억임을 눈치 챈 지석은 너무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로의 모든 것을 아는 게 서로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하선의 손을 잡는다.' 

사랑 앞에 당당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을까. 특별히 첫사랑이란 늘 그런 법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당사지인 그 사람에게 솔직히 그리고 정확히 말과 행동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싶지만, 우리 가슴 속의 그 '설렘'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모조리 망쳐버린다. 그리고 망쳐져버린 말과 행동 때문에 몇 날 몇 일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곤 한다. 이러한 보편성 때문에 극중 하선이 보여주는 답답한 캐릭터는 확실한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 모두 실은 매우 답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답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우리의 성격이 쿨했으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 것으로 믿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을 잊고 지냈었고,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잊고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억은 머리에서만 잊혀졌었나 보다. 어떤 사소하지만 '특별한 일'이 발생하면 우리의 가슴이 먼저 시리게 되고, 이에 그 기억들도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가슴 아픈 일이라면, 적어도 눈물은 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하선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예전처럼 그렇게 눈물을 흘린다. 추억에는 기쁘고 슬픈게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추억은 그냥 추억일 뿐이고, (적어도 가슴에서는)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 기억이 아닌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사랑, 그러니까 우리의 남은 모든 인생을 걸만한 그런 사랑을 만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첫사랑을 잊을 수 있을까? 아니,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윤의 죽음은 단지 시윤이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첫사랑이라는 존재가 내가 인식하는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리더라도 내 가슴 속에서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어떤 운명의 힘을 강하게 드러낸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잊어버릴 수 없고, 단지 잊혀지기를 기다릴 뿐이지만, 우리는 망각을 기다리며 살아 간다. 물론, 결코 그것이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어느 정도는 예감한 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에서 주인공 정원(한석규)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채 다림(심은하)과 사랑을 한다. 이미 곧 꺼질 자신 앞에 귀엽게 다가온 다림에게, 죽기 전 정원은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정원을 마음 속에 묻은 채 다림은 그렇게 홀로 세상을 살아간다. 살아있을 때 정원은 홀로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의 텅빈 운동장을 찾아 몇몇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감상에 빠지곤 했다. 아마 정원의 그 감정과, 시간이 흐른 후 다림이 정원을 '추억'하며 느낄 감정이,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선배 앞에서 울고난 후 집에 돌아와 홀로 방 안에서 시윤을 추억할 하선이 느낄 감정은 아마 비슷할 것이다. 무언가 텅 빈 듯한 그런 감정, 아무리 먹어도 채워질 수 없고 아무리 신나도 잊을 수 없다. 그런 감정을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무엇인지는 모두들 알고 있다. 무언가를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88회의 첫 에피소드로 돌아가서, 내상은 유선에 대해 흥미를 가지며 하루 종일 유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당신이 이렇게 예뻤나?' 아마 이 에피소드를 보며 우리들은 어떤 즐거운 느낌과 동시에 현실의 벽 또한 느꼈을 것이다. 우리 지금의 사랑이 유선만큼 예쁠 수는 없을 것이다(그녀는 너무도 아름답다!). 다만 우리는 이것 하나만을 기억해야 한다. 내 옆에 있는 그녀가 결국에는 최고이고, 최고여야만 하고, 최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p.s 김병욱pd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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