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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담론 - 회의주의 trifles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는 천민성으로 가득찬 월스트리트 자본주의에 관해 나옵니다. 젊은 펀드매니저, 주식투자가인 그들은 미국의 중심(곧 세계의 중심)에서 으리으리한 오피스텔에 거주하며 그들의 힘든 정신 노동을 보상 받습니다. 하지만 뭔가 허무합니다. 감독은 하나의 힌트를 제공해줍니다. 그들의 동료는, 서로서로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떤 한 친구는 주인공의 이름을 끊임 없이 다른 친구의 이름으로 부릅니다(이봐, 마이크). 처음엔 주인공도 '이봐, 난 마이크가 아니라 맥스라구'라고 대꾸해왔지만 그 친구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죠. 해서 주인공은 그냥 포기해버리고 그 친구가 자신을 마이크라고 부르면 '응, 왜?'라고 대답합니다. 왜였을까요? 동료들끼리의 정보 교환이 매우 중요한 요소인 그 쪽 세계에서, 의식적으로라도 외워야 할 타인의 이름을 그 친구들은 왜 그렇게 외우지 못할까요? 

이유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마이크라는 친구와 주인공은 같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같은 브랜드의 타이를 메고, 같은 브랜드의 구두를 신습니다. 정장, 와이셔츠, 버클 등, 그들의 '취향'은 너무도 비슷했던 겁니다! 감독은 천민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은 타인을 '브랜드'라는 필터를 통해서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저 영화처럼 그렇게 극단적이진 않지만 일견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높은 안목을 가지고 다양한 브랜드에서 골라서 '구입'한 나의 모습은 결국 이 세상에서 '도플갱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도플갱어를 만나게 될 때 죽음이 찾아온다는데, 뭐 그렇게 극단적일 것은 없겠지요. 

하여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옷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 꽤 대중적인 옷을 입고 있습니다. 대학생, 영어, 회화, 자격증, 과외, 동아리, 알바, 스터디 등...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길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들은 도대체 얼마나 독립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빅 브러더'에 관한 대화에선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빅브러더'는 어떤 사람인가요?" 
"좋은 질문이야. 그 분은 아주 위대한 분이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아주 높은 곳에서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지." 
"그는, 그러니까 '빅브러더'는,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존재하고 계신가요?" 
"오해하지말게, 자네는 존재하지 않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모두는 아직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어째 점점 더 우리들 모두가 몰개성화, 획일화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뭐 언제는 안 그랬겠느냐만, 과연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그 방향에 있을까요? 저는 조금은, 아니 적어도 아주 조금이라도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하이브리드가 판치는 시대에, 그 하이브리드마저도 어딘가 식상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내 자신이 나는 식상하다 그런 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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